12.26.2015

Traverse Mountain Classic Boots II

The North Face

Traverse Mountain Classic Boots I

The North Face

Survey: Iwatate Folk Textile Museum

I want to share with you a universal, unchanging beauty.

Although it's a bit small to be called a "museum", it's not very often one can see a collection of this volume and quality exhibited in one place. On the contrary, it's likely that even the best museums in the world would be hard-pressed to imitate the amount of time and single-minded dedication that was spent building this collection. The Iwatate Folk Textile Museum is located in a small building a few minutes walk from Tokyo's Jiyugaoka Station, and houses approximately 7,500 textiles collected from all around Asia over the span of 45 years by director Hiroko Iwatate.
The exhibition theme changes three times a year, and features pieces that were produced before the industrialization of textile production (pre mid-twentieth century), with a fair number of items exceeding 100 years old. The vast majority of the textiles were sourced in their native countries by Ms. Iwatate.
Ms. Iwatate was born in Tokyo in 1930 and under the tutelage of textile-dyeing artisans Yoshitaka Yanagi andd Samiro Yunoki, studied dyeing at Joshibi University of Art and Design. "At that time, the era of hand-making goods was already over. There wasn't any work when I graduated university, and I really had no idea what I was going to do. I became very enamored with Andean textiles from the Inca empire, and in 1965 I traveled for two months to New York, Peru, Mexico, and Guatemala. What I discovered during my travels was an unchanging, universal beauty. I decided that from that point on, the focus of my work would be searching the world for this beauty."
The pursuit of a fundamental, universal beauty, unaffected by the changing of the times. Ms. Iwatate made her first visit to India in 1970, and encountered textiles used by the local people. "Natural materials were spun by hand, sewn into cloth, and dyed, and then made into veils or sarees. When the cloth became old, usable parts would be torn off and sewn onto another garment for reuse. This sort of traditional handwork shouldn't have been exclusive to India, but the worldwide obsession with increasing profits and efficiency rendered handwork of this nature virtually obsolete. That being said, when I began visiting India and the Middle East in the 70's I could still find such items at the bazaar, and was able to meet people who were still pouring their energy into reviving handwork and vegetable dyeing.
Although Ms. Iwatate is a fervent collection of textiles, and is fascinated by the traditional handwork that is slowly disappearing in light of expanding industrialism, she cautions that her attraction cannot be explained by simply proclaiming "This thing is old, so it is good" or "This technique is advanced, so it is good" or "This technique is advanced, so it is good."
"These things are not designed with one's head, they are born out of a certain meaning, a concept. I feel that these kinds of things will not grow old...that there's a timeless attraction to them. For example, take the Turkmenistan "camelback decorations." Women would go around to their neighbors and ask for pieces of fabric from old brides clothing, and would sew the fabric together in little triangular shapes. Triangles are actually considered the "prayer shape" by these women. I find this absolutely adorable. Don't you think it's much more attractive than those stiff, gaudy decorative pieces?"
In a time when information on India and the Middle East was still very limited, Ms. Iwatate continued her visits to those far off places, eventually creating a map of textiles. In 1984, she published her fieldwork in a book called "Desert Village, Life and Crafts" (Youbisha). The year after, she opened a gallery and exhibited the items she had collected up until then. "There is no meaning if only I have access to these precious items. By sharing them with the world, I'd like people to hone their senses, and understand that which first captivated me. Old and young, male and female, many different people come to visit, but of course we also see many clothing design students. There were even some exchange students from China that visited, and were surprised to find garments from Chinese minority tribes in our collection - "We had no idea that such amazing things came from our own country!" Surely they returned with a newfound appreciation for the beautiful things made in their homeland."
This collection naturally features items of Japanese origin as well; notably traditional noragi and hanten pieces. Forty-five years since her first visit to India, Ms. Iwatate continues her pursuance of universal beauty, and is still actively collecting today. "You can find good 'material' anywhere. If you thoughtlessly proclaim that 'this generation isn't interesting at all,' tehn at that point it's all over. Maybe if people thought that 'these[traditional textiles] are good', maybe the world would change a bit. Even synthetic materials have improved over time, and I don't think there's anything wrong with incorporating these convenient things into your lifestyle. The important part is to figure out, with our hands, how to create our interpretation of beautiful things. It is for this purpose that I am happy to share these charming, old objects with everyone."

*These pictures were taken from the "Suzani Magnificent Embroidery" exhibition, which ran from August 6th ~ November 14th, 2015. Suzani was a type of embroidery that started in the 18th century Central Asian oasis city of Bukhara. This embroidery was hung on the walls and bed during wedding celebrations, and featured large, brilliant flower designs.

*Survey, defined as: to examine or inspect. In these features, we will be reporting on things, people, place, or cultures that inspire us in our daily work of making products.
Visvim

12.24.2015

탈진

2015 '월간 윤종신' 12월호 '탈진'은 윤종신이 올 한 해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한 노래이다. 가수, 프로듀서, 작곡가, 작사가, 예능인. 올 한 해도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활동하고 열심히 창작물을 쏟아낸 그이지만, 올 한 해는 유독 예상하지 못한 일들 때문에 깨지고 상처를 받았다. 제목에서 느껴지듯, 그에게 2015년은 정신없이 바쁘게 달리느라 '탈진'을 경험한 한 해였던 셈이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높아지면서 동시에 그가 책임져야 하는 일들도 많아졌는데, 그 속에서 겪는 갈등과 부대낌이 유난히 무겁게만 느껴졌다. '나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하는 고민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윤종신은 이번 12월호를 통해 지금은 비록 힘들고 지치지만 끝까지 노력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노래한다. 이번 앨범 커버로 UFC '코리안 불도저' 남의철 선수의 모습을 담은 것 역시 노래의 메시지와 맥락이 닿아있다. 윤종신은 최근 남의철 선수가 아쉽게 패배한 경기를 보면서 크게 감정이입을 했고,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에 결국 큰 위로를 받았다. 열정과 투지를 갖고 자신의 길을 간다는 것의 위대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월간 윤종신'은 2016년에도 계속된다. 모두가 무모하다고 생각했던 그 프로젝트가 이제 7년 차로 접어든다. 윤종신에게 '월간 윤종신'은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어, 오히려 원동력이 되는 프로젝트이다. 내년에는 초심으로 돌아가 좀 더 즉흥적으로 그달 그달 떠오르는 것들을 담을 예정이다.
12월호 '탈진'은 윤종신이 작사하고, 정석원이 작곡, 편곡했다.

Simple Is Not Simple

In 1932 Charles Danner opened his bootmaking business risking his future on a stubborn belief that, regardless of the economy, superior craftsmanship mattered. While much has changed since the first Danner boot was made, our dedication to crafting a superior product has not. Hold a Danner boot in your hand and you'll notice the hand crafted precision. Try it on and you'll feel the difference. Test it against the elements and you'll appreciate the value of a product that is built to last.
A Danner boot is a mark of unwavering quality. It has been since 1932 and will be for years to come.

12.19.2015

정당한 심판

(중략) 청년세대가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 참여가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정치 참여의 방법 역시 달라져야 한다. 자신의 요구를 정치적 이슈로 만들어서 청년세대의 표를 원하는 정치인이 이를 공약으로 내걸게 만들어야 한다. 보다 적극적으로는 청년세대가 자신이 내건 이슈별로 정치 세력화를 시도해야 하고, 기존의 정치권에도 뛰어들어야 한다. 정치에 직접 나서는 자신 세대의 새로운 정치인을 청년세대가 지지해주고 키워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정치적 참여인 투표를 해야 한다. 청년세대의 일부는 기권을 정치 혐오를 표현하는 행동으로 여긴다. 그러나 기권은 자신이 혐오하는 정치를 더욱 더 혐오스럽게 만드는 것에 일조하는 것이다. 잉여와 3포가 희망을 찾는 길은 기권이 아니라 자신의 세대 이익을 내세우고 이를 받아들이는 정치인과 정당을 선택하는 것이다.
기회는 오고 있다. 2016년에 총선이 있고, 2017년에 대선이 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선거는 계속된다. 다음 총선에서 비정규직 폐지, 인턴 폐지, 임금 차별 폐지, 선행 학습 금지, 보육의 국가 책임, 알바 최저임금 인상 등 당장의 아픔을 덜어낼 수 있는 것을 청년세대가 정치적 이슈로 요구하고 청년세대의 표를 원하는 정당과 후보가 이를 약속하게 만들어야 한다. 청년세대의 요구가 정치적 압력으로 이어지면 소속 정당과 관계없이 많은 후보들이 받아들일 것이다. 또한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표를 얻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심판도 해야 한다. 그 대상은 너무도 분명하다. 지금의 국회의원을 심판하는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정치인이 공천을 받지 못하게 나서고, 공천을 받으면 낙선 운동도 해야 한다. 정치적 행동의 실천도 물리적으로 나서야만 했던 과거와 달리 인터넷상에 청년세대만의 많은 방법이 존재한다. 기성세대가 그들을 지지하더라도 청년세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심판하겠다고 나서면, 청년세대의 표가 필요한 정치인만이라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시민들이 스스로 해낸다는 말은 아름답지만 현실성도 없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도 법과 제도로 자리 잡지 않으면 지속되기 어렵다. 시민들의 힘만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혁명이다. 지금의 불평등한 한국을 '혁명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청년세대에게 미래는 없다. 그러나 '혁명'으로 바꿀 수는 없다. 정부가 육아를 책임져야 한다고 요구하고, 선행 학습을 하지 말자고 함께 행동하고, 알바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은 당장의 고통을 덜어내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마저도 청년세대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데, 혁명이란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그래서 현실은 정치다. 아무리 좋은 정책, 다양한 조직과 튼튼한 연대를 만들어도 현실에서 이를 시행하는 힘은 정치에 있다. 정확하게는 정치인에게 있다. 시민의 힘으로 시민이 원하는 것을 정치인이 하도록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다.
반값 등록금 투쟁이 절반의 성과라도 낸 이유는 정치인이 대학생의 표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유니온과 알바노조 같이 정말 오랜만에 나타난 청년세대의 "결사체들이 최종적으로 취할 핵심적인 방법은, 결집된 표의 힘을 통해 자신들의 정책 대안과 결집된 요구를 정치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정책 결정자 또는 정당에 대해 투표 블록(bloc)으로서 행위하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될 때 정당과 정책 결정자들은 반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강력한 힘이다."
정치인은 표를 먹고산다. 보수이든 진보이든 모든 정치인은 표밭에서 갓끈을 고쳐 맨다. 청년세대가 세상을 바꾸는 방법도 궁극적으로 표의 힘이다. "자본주의는 기득권 세력, 부유층 그리고 재벌의 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중산층과 서민 소외층 그리고 중소기업의 편이다. 자본주의는 '돈'이라는 무기가 있지만,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투표'라는 무기가 있다. 국민의 절대다수는 자본이 아닌 노동으로 삶을 영위한다. 그러기에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충돌할 때, 민주주의가 가진 '투표'의 무기가 작동되면 자본주의의 '돈'이라는 무기를 이길 수 있거나 적어도 제어할 수 있다."
그들이 약속한다고 해서 그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2017년 대선에서 다시 심판할 기회가 있다. 그리고 그 다음 2020년 총선에서 또 다시 심판해야 한다. 한 번의 투표와 한 번의 참여로 정치인과 정당이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청년세대의 반복적인 '심판 투표'가 계속되면 정당과 정치인은 바뀔 수밖에 없다. 그들은 표를 먹고살기 때문이다. 2016년 총선은 청년세대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세상을 바꾸는 출발이다.
10년 전 20대는 88만 원 세대라고 불렀다. 30대가 된 그들은 이제 3포 시대로 추락했고, 그 뒤를 있는 20대는 잉여 세대에서 n포 세대로 추락하고 있다. 젊은이들의 희망을 빼앗아간 지금의 한국은 기성세대가 만든 것이다. 청년세대여, 자신을 탓하지 마라.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틀에 순응하지 말고 거부해라. "청년세대의 반역이 부재하는 시대는 어둠의 시대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에 드리워진 어둠을 거두고 희망을 다시 세울 자는 젊은이들이다. 미래에 기성세대는 이 자리에 없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미래는 젊은이들의 것이다. 젊은이가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 장하성, 왜 분노해야 하는가 中

12.17.2015

차등의 원칙

불평등을 줄이고 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분배의 평등을 실현하려는 노력은 정의로운 것이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들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 분배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불평등한 구조에서 어느 정도 또는 어떤 불평등이 정의로울 수 있는가는 분배의 정의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존 롤즈는 '불평등한 구조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불평등한 구조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유리한 불평등은 정의로운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약자에 대한 가장 유리한 불평등의 기준으로 "최소 수혜자 성원에게 최대의 기대 이익이 주어지는, '최소 극대화 형평 기준'을 제시한다." '차등의 원칙'이라고 불리는 이 원칙은 '경쟁의 결과를 나눌 때 불평등 구조에서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대의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분배의 정의라는 것이다.' 물론 불평등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용인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이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앞에서 논의했던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평등이 충족되는 구조에서 만들어진 불평등이라면, 불평등으로 인해서 가장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 사람들에게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대의 분배를 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다.
롤즈가 제시한 정의로운 분배를 규정하는 '차등의 원칙'을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는 우리가 해내야 할 몫이다. 한국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빈곤층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기 위해서 최대의 혜택을 얼마나 주어야 하는가, 기업이 만들어낸 이익 중에서 얼마만큼을 노동자에게 분배할 것인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를 얼마로 할 것인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를 얼마로 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은 시장에 맡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선택해야 할 문제다.
분명한 것은 노동자 세 명 중 한 명이 최저생계비 이하의 임금을 받는 한국의 분배 구조는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는데 소수만이 풍요를 누리고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함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한국의 경제구조는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이를 바로잡는 요구를 하는 것은 부자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심이거나 게으른 자들의 불평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이며 정의로운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분배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는 죽은 사회다. 불평등으로 고통 받는 가난한 자가 이러한 정의롭지 못한 분배를 시장경제의 당연한 귀결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이미 가진 자의 부와 권력에 예속되고 복종하는 노예이다. 불평등한 경쟁과 불평등한 분배를 시장에 맡기고 방치해버리면서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목적 자체를 상실하는 것이다. 불평등한 분배를 바로잡을 수 있는 수많은 정책들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한국 사회에 없는 것은 정책과 수단이 아니라 그러한 정책을 실천하려는 정치와 의지이다. 더 정확하게는 정치권에 그러한 정책을 실시하라는 국민의 절실한 요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미래가 암울하다.
'정의는 소수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빼앗아서 다른 사람들이 보다 많이 얻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고, 다수가 보다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서 소수에게 희생을 가용하는 것도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아무리 효율적으로 성장하는 체제라 할지라도 그것이 정의로운 분배를 실현하지 못한다면 개혁되어야 하며, 국민이 개혁을 요구해야 한다.
- 장하성, 왜 분노해야 하는가 中

차등과 정의

분배의 불평등이 경쟁의 필연적인 결과라면 반복적인 경쟁이 이뤄지는 시장경제에서는 경제가 성장할수록 불평등이 더욱 심해진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이론적 시조라 할 수 있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도 '국부론'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큰 재산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큰 불평등이 존재한다." 더 많은 부가 만들어지면, 더 큰 불평등도 함께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불평등이 더 심해지는 것이 당연한 결과라면, 여기에서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성장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리고 경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불평등은 정의로운가? 이러한 질문들은 시장경제 체제의 정당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장의 목적이 무엇인가와 불평등이 정의로운 것인가의 질문은 서로 연관된 것이기에 이에 대한 답을 함께 논의해보자.
국가 경제를 성장시키려는 목적은 '국민'을 잘살게 하기 위해서다. 불평등이 성장의 불가피한 결과라면 국민이 평균적으로 잘살게 되었을지라도 모두가 성장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어떤 국민은 더 잘살게 되지만, 어떤 국민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모두가 똑같은 분배를 받는 산술적 평등이 최선일 수는 없다. 각자의 역량과 노력의 차이에 따라서 보상이 달라지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보상의 차이가 각자의 역량과 노력의 차이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학 교과서가 가르치는 것처럼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성이 담보되는 '완전한 경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시장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출발선도 서로 다르며, 경쟁의 규칙이 모두에게 공정하게 집행되지도 않는다. 학력·성별·출신지역 등의 차별로 경쟁에 참여하는 기회가 제한되며, 갑과 을의 관계나 독과점처럼 지배적 위치에 있는 경쟁자가 불공정한 경쟁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정치적 힘과 같은 경쟁 외적 요인을 동원해서 경쟁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들도 흔한 일이다. 이와 같은 기회의 불평등과 불공정한 경쟁으로 만들어진 불평등한 분배는 정의롭지 못하다. 그러나 정의롭지 못한 분배의 불평등은 불공정한 경쟁 구조만으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타고난 역량의 차이로 인해서 경쟁의 결과가 결정되기도 하고, 자신의 노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운에 따라서 경쟁의 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개인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개인의 역량과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강요된 사회-경제적 구조에 의해서 정의롭지 못한 불평등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성이 담보된 완전한 경쟁이 성립되고 그리고 분배가 각자의 역량과 노력만으로 결정된다고 해도, 경쟁의 결과로 소수만이 풍요를 누리고 국민 다수가 빈곤으로 고통을 받는다면 '다수가 고통 받는 경쟁을, 무엇을 위해서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당연히 제기될 것이다. 빈곤으로 고통 받는 다수가 자신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경제체제를 거부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이다. 애덤 스미스도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서 움직이는 시장이 다수의 빈곤과 고통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국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사람의 큰 부자가 있기 위해서는 적어도 500명의 가난한 사람이 있으며, 소수의 풍요로움은 다수의 빈곤을 전제로 한다."
국가 경제의 목적이 '다수의 빈곤을 전제로 한 소수의 풍요'일 수는 없다. 국가 경제가 성장해야 하는 이유는 '국민이' 잘살기 위해서이지 '소수의 국민만이' 잘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공정하고 불완전한 경쟁에 의해서 만들어진 불평등만이 정당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빈곤을 전제로 한 불평등은 과정의 정당성과 관계없이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진다. 다수의 국민이 더 잘살게 되고 소수만이 빈곤으로 고통 받는 그런 불평등은 정의로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불평등에 대한 논의의 범주를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넘어서 인간의 본원적인 가치인 자유와 정의 간 관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확대해야 한다. 이 질문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논제 선상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의 범주를 넘어선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정의에 관한 어떤 논의라 할지라도 약자와 소수자의 고통을 전제로 한 다수의 행복을 정의롭다고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빈곤은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며, 다른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는 어떤 개인의 자유도 정당화되지 못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현실은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소수의 풍요가 다수의 빈곤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차선으로 다수의 풍요가 소수의 빈곤을 전제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사회는 소수의 빈곤에 대한 책임이 있다.
- 장하성, 왜 분노해야 하는가 中

12.14.2015

Rise Up

Andra Day

누가 바꿀 수 있는가

(중략) 청년들이 아프다고 한다. 기성세대가 강요한 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서 온갖 스펙을 쌓고, 자기계발을 하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긍정의 힘으로 이겨내고, 그래도 힘들면 스스로 힐링하면서도 아파한다. 그들의 아픔은 높은 이상을 이루지 못해서도 아니고, 세상을 걱정해서도 아니고, 부모 세대처럼 자유와 민주를 쟁취하려는 투쟁 때문도 아니다. 청년 세대의 아픔은 '월급 많이 주는 정규직' 일자리를 갖지 못해서이고, 저임금 비정규직을 벗어나지 못해서 오는 불평등의 아픔이다.
청년세대의 꿈이 단지 '취업'으로 쪼그라든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의 공포는 세상이 그들에게 강요한 것이다. 기성세대가 만들었고, 바꿀 생각도 없는 불평등한 현실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세대의 아픔은 결코 스펙 쌓기와 자기계발, 긍정과 힐링으로 치유될 수 없다. 내가 치유된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나의 아픔을 대신 감내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아픔은 세상을 바꾸지 않고서는 치유될 수 없다. 청년세대가 스스로 이를 깨닫고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을 힐링하는 데 나서야 한다. 혼자서 긍정의 최면을 걸고 자기계발의 노력을 하면 극복된다는 미신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초대기업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갖는 사람은 열 명 중 한 명도 채 되지 않는다. 아무리 긍정하고 힐링해도 나머지는 모두 여전히 잉여와 3포로 남아야 한다. 그러기에 자신이 아닌 세상을 힐링하고 바꿔야 한다.
지금의 정의롭지 못한 한국을 기성세대가 만들었는데 청년세대에게 세상을 바꾸는 짐을 떠넘기는 것은 기성세대가 무책임한 것이다. 더구나 청년세대는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틀에 맞추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세상을 바꾸라고 하니 억울하다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도 기성세대이기에 책임이 있다. 그러기에 청년세대에게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말해주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멘토질 같은 잔소리를 하려고 한다. 첫째, 청년세대는 기성세대가 강요하는 방식이 아닌 자신 세대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기성세대와 청년세대는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세상을 보고 있다. 미래는 청년세대의 것이지 기성세대의 것이 아니다. 청년세대가 바라는 세상을 자신의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기성세대도 그들이 청년 세대일 때부터 자신의 이상을 좇아서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었다.
둘째, 청년세대에게 강요된 틀에 무조건 순응하지 말고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한국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지금의 현실을 제대로 본다면, 그리고 그 모순된 현실이 노력 부족과 같은 자기 책임이 아니라면, 그리고 거기에서 빠져나올 방법도 없다면 분노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제대로 알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절망할 필요도, 아플 이유도, 힐링할 필요도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긍정하고 자기계발에 열중하면 된다. 청년세대의 분노는 정의롭지 않은 한국의 현실을 바꾸는 시작점이자 가장 중요한 점이다. 모든 행동은 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셋째, 지금의 청년세대가 겪고 있는 아픔을 적어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청년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못한 세대가 되었고, 그것은 기성세대의 탓이다. 청년세대 역시 기성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반복한다면, 그래서 이를 다시 다음 세대에게 물려준다면 한국은 미래가 없다. 10년 전 '88만 원 세대'였던 30대는 '3포 세대'로 추락했고, 다시 '5포 세대'로 진화하고 있다. 20대는 쓸모 없는 나머지라는 '잉여세대'라고 자조하고, 너무도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n포 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청년세대가 이런 퇴보와 퇴행과 비정상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다. 청년세대는 부모처럼 자식만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데 그치지 말고 자식의 친구들 모두에게, 자식 세대에게 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물려주어야 한다.
정의롭지 못한 분배로 만들어진 불평등으로 인해서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고통 받고, 성장의 혜택을 누리는 1%의 소수와 소외된 99%의 다수로 갈려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세상은 저절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인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지금의 불평등한 한국의 현실도 힘을 가진 기득권 세력들과 그들의 조력자들의 의도로 설계되고 실행된 결과이지 시장에서 스스로 진화한 결과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현실에 순응하고,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이 기적에서 나락으로 추락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다수의 국민들이 함께 나선다면 지금의 한국을 바꿀 수 있다. 청년세대만이 아니라 기성세대도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함께 분노해야 한다. 불평등한 불의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음까지 노예가 되는 것이다. 불평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 다수의 국민들이 함께 분노하고, 기성세대가 세상을 바꾸려는 청년세대에게 응원을 보낸다면 한국은 정의로운 사회라는 또 한 번의 새로운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
- 장하성, 왜 분노해야 하는가 中

The Meaning Of Home

The Meaning Of Home
MSR

12.03.2015

Product Introspection: Gara-Bou

Gara-Bou

Gara-Bou is a original Japanese yarn-spinning machine with a mechanism that closely mimics hand-spinning techniques.
Invented in 1876, this machine is characterized by the way that it gradually spins yarns. It was originally powered by waterwheels on the banks of rivers, and is only about one percent as efficient as modern spinning machines.
Yarns produced on a Gara-Bou machine are nonuniform nor finely spun, however, possess a unique warmth that is typically only seen in hand-spun yarn.
Excess cotton with uneven fiber lengths are shaped into an oblong bunch of cotton Yoriko, and then stuffed into a cylindrical container. In a vertical position, the cylinder is rotated about an axis allowing the cotton to be pulled up out of the cylinder and spun into yarn. The rotation of the cylinder is controlled by a mechanism at the bottom of the machine, which alternates connecting and disconnecting the spinning gears from the cylinder.
A the yarn being spun thickens, the cylinder is lifted upwards detaching itself from the spinning gear and temporarily stops rotating. Once the yarn thins out, it drops back down reattaching to resume spinning, gradually making the yarn thicker again. This repeating cycle yields a slubby, unevenly spun yarn.
As the amount of remaining cotton decreases, the weights of the containers also fluctuate. In order to control the thickness of the yarns, balance weights must be skillfully placed and adjusted by hand. Yarn spun at this very slow pace is time- and energy-consuming process requiring the vigilant eye of a trained artisan at all times.
Yet producing such unique yarns, the use of this slow-process Gara-Bou machine has declined tremendously since the advent of modern mechanical spinning machines; there is currently only one spinning house left in operation. Please take a close look at this preciously made material with your hands; you will find an ineffable character in the bumpy, uneven fabric seldom in modern textiles.
Visv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