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0.2015

Dissertation On Revealing The Practice

Once every six months, I'll put together a season collection to express what I currently want to create. Presenting the collection as an exhibition, linking the seasonal themes and ideas with the products, my vision is brought to life and communicated to an audience.
In that sense, there is a significant importance when considering the concept for each season.
At times, the ideas or themes will come together first to drive the entire design process. On other occasions, they will be recognized during the developmental process.
Though rare, this season is an example of ideas not coming forth spontaneously - much to my own anguish.
In fact, it was already early winter, with fabric design and material development nearing completion, the collection pieces beginning to really take shape.
I was assailed with worry, thinking "This isn't good - less than two months left and nothing's coming to me." With the time running out, I eventually confided in my wife.
"Well, the design part's pretty much done. If there's any searching left, perhaps it needs to be done within yourself?"
"Perhaps so," I replied, calming myself down, It was then we both decided to look at some photos we'd taken over the last few months. Though originally intended for a separate project, they vividly rekindled my memory of the design process.
It all began with my inspiration trip to the UK in July. Then, there was that August road trip over to America's West Coast.
Also in August, was the Los Angeles kick-off meeting with the design team. Ah, then there was that gathering in Paris to discuss development of a special fabric.
And next - a brief trip to Seattle, Washington.
September saw me at the Arno riverside in Florence, deciding this season's color palette with the team.
I then went on yet another road trip to speak with a European supplier, followed by an excursion to Florida in search of further inspiration.
And how could I forget that wonderful team meeting nearby Italy's Lake Garda, where the mock-up was done?
Come November, I had a photo-shooting with our Tokyo team in California.
From there, it was just a short hop to go discover the Sequoia National Park.
In Japan, the sales team and I presented The Traveling Trailer event in Sendai and back in Tokyo, atop the tatami mats of my atelier, we had a design meeting.
And then finally one more, again in Los Angeles.
Looking through a mountain of photos and contact sheets, each facet of the design process - and the moments of inspiration therein - sprang back to life, making me aware of the unbelievable wealth of stories I had amassed.
Indeed, I had spanned the entire globe four and a half times in a simple matter of months. And so I wondered - could the journey my team and I shared somehow be communicated to our audience? Though the snapshots, taken with a compact 35mm camera, were far removed from the realm of fancy or artsy - the faces and scenery captured along the way were all too authentic.
I have fond memories of the moments buying and listening to old records and CDs - staring at the album artwork while completely engaged in the artists' soundscapes.
Whether in the liner notes or back covers, the photos and images featured were intimately genuine.
So I asked my wife if we could use the photos to tell the story of this season's collection - to which she delightfully agreed...
"Dissertation on revealing the practice"
I hope in sharing this exceptionally real design process, our customers can continue to find even more enjoyment from our products. Thank you.
- Hiroki Nakamura
Visvim

7.24.2015

청춘은 아름다운가?

'해답이 없는 물음을 가지고 고민한다.' 그것은 결국 젊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달관한 어른이라면 그런 일은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청춘이란 한 점 의혹도 없을 때까지 본질의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든 그렇지 않든, 사회에 이익이 되든 그렇지 않든 '알고 싶다'는 자기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갈망과 같은 것을 솔직하게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좌절과 비극의 씨앗이 뿌려져 있기도 합니다. 미숙하기 때문에 의문을 능숙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위험한 곳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청춘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시로』 속에 매우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산시로가 열차에 투신자살해 몸이 잘린 젊은 여성의 시체를 보는 장면입니다. 이야기의 흐름과는 관계가 없이 조금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장면은 없어도 좋을텐데'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나쓰메 소세키가 "청춘이란 밝은 것만이 아니고 한 꺼풀만 벗기면 죽음과 맞닿아 있는 잔혹한 것이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청춘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화하는 시기이며, 험준한 골짜기 위에 설치된 통나무를 '줄타기'처럼 건너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한 걸음만 잘못 떼어 놓으면 골짜기 아래로 추락하고 마는 위험한 시기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위험한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발아래에 놓여 있는 죽음의 심연을 바라보게 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내 경우는 재일 한국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에 대해, 또는 나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 어쩔 수 없이 고민해야 했지만, 특별히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도 의문과 불안이 까닭 없이 용솟음쳐서 어쩔 수 없이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반드시 찾아온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원숙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말하면 원숙함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딱딱한 표현이지만 '표층적으로 원숙한 것'과 '청춘적으로 원숙한 것'이 그것입니다.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는 말할 것도 없이 후자입니다. 그들처럼 훌륭한 사람들도 평생 '청춘이 지닌 착오'와 같은 것을 되풀이하며 살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그들도 청춘적으로 원숙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나는 청춘 시절부터 '나'에 대한 물음을 계속하며 '결국 해답은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그보나 '해답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다'라는 해답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음 위를 지치듯 모든 일의 표면만 지친다면 결국 풍성한 것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청춘은 좌절이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실패가 있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나이를 먹어도 청춘의 향기를 잊고 싶지 않습니다.
- 강상중, 고민하는 힘 中

7.22.2015

현관

어릴 때 방학이 되면 친할머니가 계신 시골에 내려가 지냈다.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할머니의 땀과 사랑이 배어 있다. 할머니는 어린 손주에게 모든 것을 허용했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문지방 위에 서지 마라!" 할머니는 내가 문지방 위에 서면 집안으로 들어오는 복이 달아나고 귀신이 나를 잡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때만 되면 문지방 위에서 놀다 할머니한테 혼나던 기억이 난다.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장소가 있다. 내부를 외부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특별한 공간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건물 내부로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기다린다. 이곳은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닌 '가물가물한' 장소이기 때문에 현관(玄關)이라고 불렀다.
건축에서 현관이란 주택의 정면에 낸 출입구를 이른다. 지금은 일반집의 단순한 출입구나 신발을 벗어 놓는 장소로 그 뜻이 축소되었지만, 원래는 불교사찰의 첫 번째 문을 가리켰다. 불교에서 현관은 현묘(玄妙)한 도(道)로 들어가는 문으로 속세를 떠나 영원한 극락세계로 떠나기 위한 출발점이다. 현(玄)자는 원래 누에가 고치를 치기 위해서 자신의 입에서 실을 뽑는 행위와 누에가 고치 안에서 변신하여 나비가 되는 신비한 변화를 형상화한 단어이다. 누에는 몸을 8자로 움직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실을 뽑아낸다. 그 행위를 '작고 여리다'는 뜻으로 요(요)라 부른다. 이 지속적인 행위로 고치를 짓는 것을 현(玄)이라고 한다. 밖에서는 볼 수 없지만, 고치 안에서는 천지가 개벽하는 변신이 일어난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그 안에서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나비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누에가 나비가 되는 '가물가물'하게 나오는 과정을 현(玄)이라 한다.
라틴어로 문지방이나 현관을 의미하는 단어는 '리멘'(limen)이다. 리멘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하고 힘든 기다림의 시간이며 장소다.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장소이지만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없다. 이곳은 떠나고 난 후에 그 진가를 인정받는 장소이며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치할 수 없다.
해리 포터 시리즈 작가인 조앤 롤링은 20대 자신의 삶을 다음과 같이 덤덤하게 말한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혼하여 미혼모가 되었고 실업자였으며 홈리스였다. 그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터널 안에 갇혀 있었다. 
그녀는 이 기간에 자신의 삶에 있어서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자기 자신'이 아닌 척하기를 그만둔다. 그리고 자신에게 중요하고 절실한 일에 집중한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고 타인에게 의존적이며 종속적인 인간에서 자기 자신을 응시하여 새로운, 놀랍고 자신만의 거친 길을 찾는다.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은 살아있고, 사랑하는 딸이 있으며 오래된 타자기와 풍부한 상상력이 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리멘'이라는 불안한 시간과 공간은 자신의 삶을 다시 건축하는 단단한 심연의 바닥이 된 것이다. 조앤 롤링은 누에로 남아있지 않고 리멘을 통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훨훨 날게 되었다.
프랑스 인류학자 반 즈네프는 '리멘'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통과의례>라는 책을 저술했다.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려는 입문자(入門者)는 다음 세 단계를 성공적으로 완수해야 한다. 
첫 번째 '분리'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과거로 상징되는 모든 것들을 의도적으로 버리는 단계다.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한 세계와의 의도적인 단절이다. 이 단절을 '혁신'(革新)이라 부른다. '혁'(革)자는 갑골문에서 소의 가죽을 정교하게 벗겨 낸 모양으로 뿔, 몸통, 그리고 꼬리 부분이 한자에 남아있다. 자신이 안주하던 소 몸체에서 가죽을 정교한 칼로 벗겨 내야 한다. 특히 소가죽에 남아있는 기름이나 털을 제거해야만 그 가죽이 경직되지 않고 유연해질 수 있다. 이 과정을 무두질이라 부른다. 인간들은 구석기 시대부터 수렵-사냥을 통해 얻은 가죽에 기름을 바르거나 연기에 그을려 연하게 만들었다. 후에는 잿물에 가죽을 담가 털과 기름을 완전히 제거한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가차 없이 버리는 행위가 종교에서는 성기에 상처를 내는 할례, 혼돈을 상징하는 물에 자신의 몸을 담그는 세례와 같은 행위로 나타난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전이'(轉移)와 '통합'의 단계다. 첫 번째 단계가 단시간에 일어난 사건이라면 이 두 번째 단계인 전이는 리멘의 단계다. 오래된 자아를 소멸시키는 오랜 기간의 투쟁의 시간이고 세 번째는 조용히 다가오는 단계다. 자신의 몸에 밴 습관이나 행동을 제거하고 새로운 자아를 만드는 창조의 시간이다. 이 기간은 문지방 위에 서 있는 불안한 시간이다.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려는 입문자는 오래된 자아를 점점 소멸시키고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여 새로운 자아를 점점 늘려 만들어 가는 단계다.
이 단계의 스승은 외부에 있지 않다. 자기 자신을 위해 스스로 만든 '시간'과 '공간'이다. 이 구별된 시간과 공간을 '고독'이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 불안해하는 외로움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물인 고독이다. '고독'은 보통사람들을 위대한 성인이나 위인으로 탈바꿈시킨다. 일개 상인이었던 무함마드는 메카 외곽에 있는 히라 동굴에서 '자신에게 온전히 헌신하고 묵상하는' 고독한 훈련을 통해 이슬람 종교를 창시하고 16억 인구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충분한 전이 단계에 거한 자가 자신도 모르게 들어서는 단계다. 이것을 ‘통합’의 단계라 부른다. 
입문자는 자신이 새로운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세 번째 단계인 통합 단계에 들어섰다고 확신하는 순간 그는 타락하고 만다. 자신의 그런 오만이 그를 처음의 단계로 매정하게 보낼 것이다. 
두 번째 리멘의 단계 아래서 유유자적하는 상태를 '서브라임'(sublime)이라 부른다. 
'서브라임'은 흔히 '숭고한'으로 번역되는데, 그 어원적인 의미는 '리멘'(limen) '아래서'(sub)이다.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 자신 안에서 최선을 찾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이미 숭고하다. 그는 자신만의 별을 발견하고 묵묵히 걸어가는 자이기에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 배철현, 경향신문 오피니언 中

7.06.2015

Journey To The Birthplace Of Coffee

In 2009, actors Hugh Jackman and his wife, Deborra-lee Furness, traveled to Ethiopia as ambassadors for World Vision Australia, one of the world's largest humanitarian aid organizations. As longtime donors, the Jackmans wanted to visit a World Vision community development project to see how rural communities were being empowered to eradicate poverty. 
While in the Yirgacheffe region, Hugh met a 27 year-old coffee farmer named Dukale, working to lift his family out of poverty. Spending time on Dukale's farm, Hugh learned first-hand about the value of fair trade coffee and clean cookstove technology. By utilizing shade grown farming practices and limiting reliance on fossil fuels, Dukale was able to create a bio-farm with a zero carbon footprint and resounding health implications for his family. Additionally, his wife, Adanesh, who traditionally collected firewood for the family’s energy needs, now had time to focus on other income generating opportunities while their children pursued an education.
As a gesture of their new friendship, Dukale invited Hugh to plant some coffee seedlings on his farm - Hugh accepted and named two trees after his own children, Oscar and Ava. Hugh was so inspired by his experience with Dukale, that he made a promise to advocate on behalf of farmers in developing countries and pledged to only drink fair trade coffee. At the end of his trip, Hugh visited the Ethiopia Commodity Exchange in Addis Ababa to see how coffee is traded on the global market. While watching the coffee prices fluctuate, Hugh found himself rooting for the prices to go up in order to benefit hard working coffee farmers.
Upon his return home to New York City, Hugh was invited to speak at United Nations Climate Week where he made an impassioned plea to world leaders to provide support for farmers like Dukale in developing countries. However, after his UN speech, Hugh still felt that there was more he could do and began talking to people in his neighborhood and at local coffee shops about the impact of fair trade coffee on the environment and the lives of the growers. He came to understand that something as simple as a cup of coffee had the potential to reduce global poverty through the choices consumers made in the United States. After sharing his newfound insights and experiences in Ethiopia with a friend in the restaurant business, Hugh decided the best way for him to have a direct impact on poverty reduction was to start a coffee company in order to trade directly with the growers. In 2011, Hugh launched Laughing Man Coffee & Tea to provide a marketplace for farmers like Dukale to sell their goods to consumers across the U.S.
Years later, the coffee trees Hugh and Dukale planted started to bear fruit. Dukale increased production on his farm, hired more local workers, and re-invested his profits to purchase additional land. Adanesh now runs a successful cafe in their village and their eldest child, Elias, is on track to become the first family member to graduate high school. Hugh’s coffee company, Laughing Man, recently partnered with one of the world's largest purchasers of fair trade coffee to distribute their products all over the world. As part of his ongoing commitment, Hugh contributes 100% of his profits to the Laughing Man Foundation, which he created to support educational programs, community development and social entrepreneurs around the world.

Dukale's Dream

Dukale's Dream

민주주의의 주체로서 "깨어 있는 시민"을 상정하는 것의 문제

(중략) 한국 사회의 진보적 지식인 일각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주체로서 "깨어 있는 시민"을 상정하는 것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특정의 이해 방법, 즉 민주주의를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한 도덕 운동으로 이해했던 방식과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민주 시민은 민주주의를 올바로 이해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는 존재 내지 의식적으로 각성된 존재로 이해된다. 민주주의를 이렇게 인식할 때, 민주주의 세력이 아니라고 간주되는 사람들, 즉 집권 정당에 투표하거나,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지 않거나, 집권 정부를 규탄하지 않거나, 투표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깨어 있는 시민의 범주에 속하기 어렵다. 민주 대 반민주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이런 인식은 자의적이고 주관적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깨어 있는 시민이라는 말은, 앞서 로버트 달이 말했던 것과 시민들이 이슈에 대한 계몽적 이해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기준과는 전혀 다르다. 로버트 달은 올바른 판단을 위해 관련 이슈에 대해 충분한 정보와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향유해야 함을 말할 뿐, 시민의 이해 수준이나 인식 수준을 기준으로 민주주의와 비민주주의를 구분하지 않는다. 반면 '깨어 있는 시민론'은 민주주의를 도덕화하는 정형화된 이해 방식에 따라, 민주 시민이라면 현실을 독해할 능력을 보여 주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민주 대연합을 촉구하는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주주의의 후퇴, 민생 파탄, 평화 위기"라는 정세관을 공유한 기초 위에서 "민주주의 위기 극복"을 위해 "행동하는 양심"으로 나서야 한다는 절박한 주장에 반응할 때 그 시민은 깨어 있는 존재가 된다. 그것은 진보적 운동의 전통을 앞세운 엘리트주의적이고 도덕주의적인 민주주의관의 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먼저 민주주의를 도덕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정의했을 때 그 해석자는 보통 시민들에 대해 일정한 도덕적 우위를 갖는 위치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사람들이 그렇게 정의된 민주주의를 수용하지 않을 때 그들 시민은 "깨어 있는 시민"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민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도덕적 지도자의 가르침의 대상이 된다. 이제 한 시민이 민주주의자가 되고, "깨어 있는 시민"이 되는 것은, 누군가가 그에게 부여한 도덕적 규범을 행동으로 옮기고 시민된 책무를 수행할 때이다. 이런 내용의 민주주의관은 시민에게 과도한 도덕적 의무를 부과한다. 그런 논리에 따르자면, 보통 시민들은 투사가 되기 전까지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누군가가 민주주의는 이런 것이다, 이런 것이어야 한다라고 정의해 주고 가르쳐 주기 이전에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들 속에서 발견되고 진화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점을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미국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였다. 그의 간결한 표현을 빌리면 "인민을 위해 민주주의가 만들어졌지, 민주주의를 위해 인민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샤츠슈나이더 2008, 215).
그의 관점에 따르면, 현실 속에서 인민은 온전한 주권자가 아니라 다만 절반의 주권자일 뿐이다. 민주주의하에서 인민이 투표를 통해 자기 의사를 표출하고 자신의 이익과 가치를 구현할 수 있으려면 정당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정치적 리더십과 조직, 대중과 전문가의 협력 체제, 정치적 이슈의 올바른 정의, 투표자의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갈등 축의 설정 등 민주정치의 대부분은 정당의 기능과 관련된 사항들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잘 실천하는 것의 책임은, 도덕적 책무를 부과 받는 시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의사와 요구를 잘 대표해야 할 정당에 있다.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유념해야 할 문제는, 민주주의에서는 그 누구도 시민들을 도덕적으로 압박할 특권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 최장집,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 中

7.01.2015

민주화 이후 정당 체제의 이상과 실제

(중략) 현재의 정당 체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정치의 대표 체계는 이런 기본적 경제정책 노선의 지속성에 기능적으로 잘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류 언론과 많은 사람들은 과거 김대중 정부, 현 노무현 정부에 대해 개혁적·진보적·좌파적, 심지어 이데올로기적 공격성을 띤 언어로 친북적이라고까지 말하면서, 한나라당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진보·개혁과 보수, 좌와 우의 구분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이념적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경제적 이념과 정책의 차이를 기준으로 할 때, 그것은 없는 차이에 근거한 허구이거나 이데올로기적 규정 이상일 수 없다. 한국 정치의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보편적인 이념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정당 간 사회경제적 이념과 정책에 대한 차이가 매우 작고 사소함에도, 정치 세력 간 대결의 양상은 극히 이데올로기적이고 갈등적이며 치열하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그 차이가 작기에 정치 갈등의 양상은 좀 더 치열하고 이데올로기적인 양태를 띠게 된다. 정치적 갈등이 사회경제 정책의 차이를 기반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한국의 정당들이 모두를 대표하면서도 누구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정치에 관심이 있는 외국 정치학자 누군가가 한국의 정치학자에게 한국에서는 어느 정당이 재벌의 이익을 대표하느냐, 누가 중소기업을, 누가 노동자·농민의 이익을 (더 많이) 대표하느냐고 묻는다면, 이에 선뜻 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보수적인 한나라당이 재벌 이익을 대표하고, 열린우리당이 중소기업이나 노동자 이익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각 정당은 모두를 대표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이들을 보수적·진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다른 이슈의 차원에서 어떤 정당이 인권 또는 평화를 더 지지하기 때문에 진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민주화와 탈냉전 시기에는 어떤 보수적 정당도 인권을 부정하면서 평화가 아닌 전쟁을 지향한다고 공언할 수 없다. 그것은 민주화의 공통적이며 보편적인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 정당이 한결같이 격렬하게 투쟁한다는 사실은 한국적 현상임에 분명하다. 그 한 원인은 과거 민주화 이전 시기의 갈등을 불러내고, 현재의 문제보다는 과거사와 관련된 적대 관계를 불러내는 한국 정치의 갈등 패턴에서 발견할 수 있다.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의 대립축은 중요한 차이이고 갈등임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민주화 20년을 경과한 오늘의 현실에서 중심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립과 갈등이 일차적으로 현실에 기초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관념과 담론을 통해 불러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와 이슈의 긴박함과 정치사회에서 통용되고 소비되는 관념 내지 담론 사이의 괴리는 클 수밖에 없고, 이 양자 사이의 간극이 큰 만큼 이데올로기적 담론이나 정치 언어가 대변하는 갈등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 민주화 이후의 정치를 이데올로기의 정치로 특징지을 수 있는 이유는 현상적으로 한국 정치에서 제거하는 방법이 아니라 정당 체제를 사회 현실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중략) 여기에서 정당이 민중적 삶의 요구를 대변하고 이를 위한 대안을 조직한다고 말하는 것이 성장 대 분배,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대 케인스주의적 복지 체제, 친 기업 대 반기업, 친노동 대 반노동, 친한미 FTA 대 반한미 FTA 등과 같은 이분법적 대립항을 설정하면서 후자를 추구하는 방식, 즉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에 대한 근본적 반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대안의 형성과 그에 바탕한 정치적 조직화가 이처럼 조야하고 도식적인 이분법적 대립항에서 후자를 추구하는 데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헤게모니라 할 수 있다. 이런 이분법으로 표현되는 담론과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한국 정치 현실에서 압도적으로 지배적인 갈등 축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Schattschneider 1975/1960).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성장 정책이라는 일종의 단원론적 이념과 정책 노선을 표현하는 다른 말 이상이 아니다. 사회경제 정책에서 이른바 담론으로 표현되는 차이와는 무관하게 정당들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실제의 사회경제적 갈등이 정치 경쟁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정치 영역에서 이 문제를 제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흔히 '지역당 체제'로 불리는 지역 간 엘리트 경쟁 체제 내지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자원 배분을 둘러싼 경쟁이 갈등의 중심축이 되는 상황, 나아가 대북 정책, 한미 관계, 외교정책을 포함한 민족문제와 대외 정책의  차이를 중심으로 한 정당 간 갈등 상황은, 사회경제적 이슈가 배제된 정당 체제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바꿔 말해, 기존의 갈등 축이 억압하고 있는 잠재적인 갈등 축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 다수 민중의 삶의 현실을 지배하는 사회경제적 문제이며, 이런 갈등이 기존 갈등을 대체하면서 정치 경쟁의 내용으로 들어올 때 대안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 사회적 이슈는 어떻게 성장과 분배, 노동 보호가 적절하게 결합할 수 있는지, 어떻게 시장경제와 복지 정책이 결합할 수 있는지, 어떻게 기업과 노동이 공존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문제가 될 것이다.
- 최장집, 어떤 민주주의인가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