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답이 없는 물음을 가지고 고민한다.' 그것은 결국 젊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달관한 어른이라면 그런 일은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청춘이란 한 점 의혹도 없을 때까지 본질의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든 그렇지 않든, 사회에 이익이 되든 그렇지 않든 '알고 싶다'는 자기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갈망과 같은 것을 솔직하게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좌절과 비극의 씨앗이 뿌려져 있기도 합니다. 미숙하기 때문에 의문을 능숙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위험한 곳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청춘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시로』 속에 매우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산시로가 열차에 투신자살해 몸이 잘린 젊은 여성의 시체를 보는 장면입니다. 이야기의 흐름과는 관계가 없이 조금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장면은 없어도 좋을텐데'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나쓰메 소세키가 "청춘이란 밝은 것만이 아니고 한 꺼풀만 벗기면 죽음과 맞닿아 있는 잔혹한 것이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청춘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화하는 시기이며, 험준한 골짜기 위에 설치된 통나무를 '줄타기'처럼 건너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한 걸음만 잘못 떼어 놓으면 골짜기 아래로 추락하고 마는 위험한 시기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위험한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발아래에 놓여 있는 죽음의 심연을 바라보게 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내 경우는 재일 한국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에 대해, 또는 나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 어쩔 수 없이 고민해야 했지만, 특별히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도 의문과 불안이 까닭 없이 용솟음쳐서 어쩔 수 없이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반드시 찾아온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원숙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말하면 원숙함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딱딱한 표현이지만 '표층적으로 원숙한 것'과 '청춘적으로 원숙한 것'이 그것입니다.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는 말할 것도 없이 후자입니다. 그들처럼 훌륭한 사람들도 평생 '청춘이 지닌 착오'와 같은 것을 되풀이하며 살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그들도 청춘적으로 원숙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나는 청춘 시절부터 '나'에 대한 물음을 계속하며 '결국 해답은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그보나 '해답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다'라는 해답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음 위를 지치듯 모든 일의 표면만 지친다면 결국 풍성한 것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청춘은 좌절이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실패가 있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나이를 먹어도 청춘의 향기를 잊고 싶지 않습니다.
- 강상중, 고민하는 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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