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1.2015

민주화 이후 정당 체제의 이상과 실제

(중략) 현재의 정당 체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정치의 대표 체계는 이런 기본적 경제정책 노선의 지속성에 기능적으로 잘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류 언론과 많은 사람들은 과거 김대중 정부, 현 노무현 정부에 대해 개혁적·진보적·좌파적, 심지어 이데올로기적 공격성을 띤 언어로 친북적이라고까지 말하면서, 한나라당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진보·개혁과 보수, 좌와 우의 구분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이념적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경제적 이념과 정책의 차이를 기준으로 할 때, 그것은 없는 차이에 근거한 허구이거나 이데올로기적 규정 이상일 수 없다. 한국 정치의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보편적인 이념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정당 간 사회경제적 이념과 정책에 대한 차이가 매우 작고 사소함에도, 정치 세력 간 대결의 양상은 극히 이데올로기적이고 갈등적이며 치열하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그 차이가 작기에 정치 갈등의 양상은 좀 더 치열하고 이데올로기적인 양태를 띠게 된다. 정치적 갈등이 사회경제 정책의 차이를 기반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한국의 정당들이 모두를 대표하면서도 누구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정치에 관심이 있는 외국 정치학자 누군가가 한국의 정치학자에게 한국에서는 어느 정당이 재벌의 이익을 대표하느냐, 누가 중소기업을, 누가 노동자·농민의 이익을 (더 많이) 대표하느냐고 묻는다면, 이에 선뜻 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보수적인 한나라당이 재벌 이익을 대표하고, 열린우리당이 중소기업이나 노동자 이익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각 정당은 모두를 대표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이들을 보수적·진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다른 이슈의 차원에서 어떤 정당이 인권 또는 평화를 더 지지하기 때문에 진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민주화와 탈냉전 시기에는 어떤 보수적 정당도 인권을 부정하면서 평화가 아닌 전쟁을 지향한다고 공언할 수 없다. 그것은 민주화의 공통적이며 보편적인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 정당이 한결같이 격렬하게 투쟁한다는 사실은 한국적 현상임에 분명하다. 그 한 원인은 과거 민주화 이전 시기의 갈등을 불러내고, 현재의 문제보다는 과거사와 관련된 적대 관계를 불러내는 한국 정치의 갈등 패턴에서 발견할 수 있다.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의 대립축은 중요한 차이이고 갈등임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민주화 20년을 경과한 오늘의 현실에서 중심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립과 갈등이 일차적으로 현실에 기초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관념과 담론을 통해 불러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와 이슈의 긴박함과 정치사회에서 통용되고 소비되는 관념 내지 담론 사이의 괴리는 클 수밖에 없고, 이 양자 사이의 간극이 큰 만큼 이데올로기적 담론이나 정치 언어가 대변하는 갈등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 민주화 이후의 정치를 이데올로기의 정치로 특징지을 수 있는 이유는 현상적으로 한국 정치에서 제거하는 방법이 아니라 정당 체제를 사회 현실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중략) 여기에서 정당이 민중적 삶의 요구를 대변하고 이를 위한 대안을 조직한다고 말하는 것이 성장 대 분배,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대 케인스주의적 복지 체제, 친 기업 대 반기업, 친노동 대 반노동, 친한미 FTA 대 반한미 FTA 등과 같은 이분법적 대립항을 설정하면서 후자를 추구하는 방식, 즉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에 대한 근본적 반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대안의 형성과 그에 바탕한 정치적 조직화가 이처럼 조야하고 도식적인 이분법적 대립항에서 후자를 추구하는 데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헤게모니라 할 수 있다. 이런 이분법으로 표현되는 담론과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한국 정치 현실에서 압도적으로 지배적인 갈등 축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Schattschneider 1975/1960).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성장 정책이라는 일종의 단원론적 이념과 정책 노선을 표현하는 다른 말 이상이 아니다. 사회경제 정책에서 이른바 담론으로 표현되는 차이와는 무관하게 정당들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실제의 사회경제적 갈등이 정치 경쟁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정치 영역에서 이 문제를 제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흔히 '지역당 체제'로 불리는 지역 간 엘리트 경쟁 체제 내지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자원 배분을 둘러싼 경쟁이 갈등의 중심축이 되는 상황, 나아가 대북 정책, 한미 관계, 외교정책을 포함한 민족문제와 대외 정책의  차이를 중심으로 한 정당 간 갈등 상황은, 사회경제적 이슈가 배제된 정당 체제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바꿔 말해, 기존의 갈등 축이 억압하고 있는 잠재적인 갈등 축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 다수 민중의 삶의 현실을 지배하는 사회경제적 문제이며, 이런 갈등이 기존 갈등을 대체하면서 정치 경쟁의 내용으로 들어올 때 대안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 사회적 이슈는 어떻게 성장과 분배, 노동 보호가 적절하게 결합할 수 있는지, 어떻게 시장경제와 복지 정책이 결합할 수 있는지, 어떻게 기업과 노동이 공존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문제가 될 것이다.
- 최장집, 어떤 민주주의인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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