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7.2016

Survey: Katsuojima-shirt & Uogashi-shirt

Japanese workwear born from the lifestyle of fishermen.

Yaizu Port in Shizuoka Prefecture, which even today boasts the country's top volume of fish landings, namely bonito, is a flourishing fishing port with an extensive history spanning back to the Edo period.
Traditionally, when the local fishermen reeled in the bonito by ippon-zuri, or single-hook fishing, they removed the hooks by holding the fish sandwiched under their arms, so they wore workwear called 'katsugimon'. The katsugimon were worn with sturdy cotton thread that helped prevent the bonito from slipping.
During the end of the Taisho period, a specific style of white shirt with blue vertically striped patterns became a popular choice among fishermen. The fabric was woven by the women of the household with the hope of large hauls and the safety of their family members.
The men would then bring these hand-woven fabrics to tailors to have them altered into shirts. All of the fishermen from Yaizu who traveled around the country, from Okinawa in the south to the Sanriku coast in the north, to follow the migration patterns of bonito became widely recognized due to their unique style of shirts.
This type of workwear, which eventually became known as the 'Katsujima' shirt, was created with an emphasis on functionality. Made with thick, sturdy cotton material, the shirt, which were made long to prevent them from getting untucked from the pants, featured loose doleman sleeves that made it easier to move, stand-up lapelless collars, narrow cuffs, and chest pocket flaps to store cigarettes and other small items.
At the 'Yaizu Fishery Museum', where traditional Yaizu fishing gear is collected and displayed, you can see the actual Katsuojima shirts worn at the time.
Katsuojima shirts were regularly worn by fishermen in Yaizu until around 1965, due to the spread of ready-made clothes, the amount of time and effort it took to hand weave them the shirt became almost completely obsolete. While there were over 30 tailors in Yaizu before the Second World War, that number steadily declined over time. Under these circumstances, it was one man, the late Yozo Mori, commonly referred to as 'Yaizu's last Katsuojima tailoring craftsman' and owner of Morishou Shoten, a store that was established in 1913, who kept the tradition alive. However, during the beginning of the 21st century, Mori, who had continued to manufacture the traditional Katsuojima shirts, made the decision to retire from his craft.
The Katsuojima shirt was in danger of facing complete 'extinction', but Makoto Mochizuki, owner of 'Yakitsu-ya', a Yaizu-based store that carries traditional Japanese products, proposed to develop a successor in order to pass down the culture of the shirt onto the next generation. Akiko Suzuki, who lived in Yaizu and possessed excellent dressmaking techniques, was chosen to inherit the pattern and manufacturing techniques of the Katsuojima shirt. Today, Suzuki carries on the Morishiou Katsuojima brand all by herself, carefully hand-stitching each Katsuojima shirt individually.
In addition to the Katsuojima shirt, there is another type of shirt that has been regularly worn by men in the fishing industry in Yaizu. During the early Showa period, an era when people did not own many possessions, a style of shirt called the 'tenugui juban' that featured three-quarter sleeves made by piecing together cotton tenugui or Japanese hand towels, typically used during festivals or given as gifts in return for presents that were received.
The loosely-woven cotton tenugui fabric possessed superb moisture-absorption and quick-drying properties, and the loose fitting design provided excellent breathability, making it a popular garment for the summertime. In 1977, Mori's Morishou Shoten commercialized the tenugui juban shirt after dyeing it with an original hand-dyeing method called 'chusen', a technique that was passed down from the province of Enshu, and then tailoring it with a fabric that featured an 'uogashi' (fish market) logo. He named this garment the 'Uogashih shirt'.
The Uogashi shirt slowly became popular among the local residents, and during the 21st century it was featured in the media as an item that would help revitalize the city of Yaizu, and today is worn by municipal officers to promote the city. Just as Aloha shirts are to Hawaii and Kariyushi shirt are to Okinawa, Uogashi shirts have come to represent the city of Yaizu.
The culture of these types of utility garments, which were born out of the everyday work and lifestyles of the common people, still exist today thanks to the strong desires and passion of the local residents to preserve these pieces.

*Today, Yakitsu-ya is the only store that still carries products from the Morishou brand. Morishou Katsuojima shirts are made to order and normally take between 100 and 200 days to deliver.
Visvim

9.01.2016

유리문 안에서 II

33.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나는 혼자 고립해서 살아갈 수 없다. 저절로 남들과 교섭할 필요가 반드시 생기게 마련이다. 사철 문안인사, 거래, 더욱 복잡하게 얽히는 흥정관계 -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기란 제 아무리 고담古談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나로서도 역시 어려운 일인 것이다.
나는 남이 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전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그들의 언동을 모두 그 정면에서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내가 천성적인 이 단순한 성품에 자신을 맡긴 채 조금도 자기를 뒤돌아보지 않는다면, 나는 가끔 엉뚱한 사람에게 속아 넘어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 결과 뒤에서 바보 취급을 당하거나 비난을 받기도 할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면전에서까지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하지 않는다고도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은 모두 다 닳고닳은 거짓말쟁이라고 단정해 버리고는 처음부터 상대방의 말은 들으려고도 않고, 마음도 주지 않으면서 그 이면에 숨어 있을 듯한 반대 의미만을 가슴에 새긴 채 그것으로 자신을 현명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거기에서 자기 만족과 마음의 안주를 찾아낼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사람을 자칫 오해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무서운 과실을 범할 각오를 처음부터 가정하고 덤벼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때로는 필연적인 결과로서, 죄없는 사람을 모욕할 정도로 후안무치의 얼굴도 준비해 두지 않으면 일이 곤란해진다.
태도를 이 양쪽 중 어느 한쪽에 서서 처신하려고 들면 내 마음속에는 다시 일종의 고민이 일어난다. 나는 나쁜 사람을 믿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악인이라고도, 또 한결같이 선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태도도 상대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변화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고 또 누구나 실행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만, 과연 그것이 상대방에게 딱 들어맞아 한 치의 틀림도 없는 미묘하고 특수한 선 위를 무난하게 걷고 있는 것일까. 내 큰 의문은 항상 거기서 복잡하게 뒤엉킨다.
나의 곡해曲解는 일단 접어 두고, 나는 과거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바보 취급을 당했다는 쓸쓸한 기억을 갖고 있다. 동시에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일부러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은연중에 그 사람의 품성에 창피를 주는 것 같은 해석을 한 경험도 많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나의 태도는 우선, 지금껏 겪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다. 그리고 앞뒤 관계와 주위의 상황에서 비롯된다. 마지막으로는, 애매한 말이기는 하지만, 내가 하늘로부터 점지받은 직감이 얼마쯤 작용한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바보 취급을 당하거나 또는 상대방을 바보 취급하거나, 드물게는 상대방에게 걸맞은 대우를 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내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넓은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몹시 좁다. 게다가 대부분 어떤 한 사회의 일부분에서 수없이 되풀이된 경험이어서 다른 사회의 일부분으로 가지고 갔을 때 전혀 통용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앞뒤 관계라든지 주위 상황 같은 것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그 응용 범위가 한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두루 마음을 헤아리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더욱이 마음을 헤아리는 시간이나 재료가 충분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극히 위태로운 자신의 직감이란 것에 의지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내 직감이 과연 맞았는지 틀렸는지, 요컨대 객관적 사실에 의거해서 그것을 확인할 기회가 없을 때가 많다. 거기에 또 내 의심이 시종 안개처럼 끼어서 내 마음을 괴롭히고 있다.
이 세상에 전지전능하신 신神이 있다면 나는 그 신 앞에 무릎을 꿇고서 나에게 티끌만 한 의심도 끼어들 여지가 없을 만큼 밝고 맑은 직감을 주시어 나를 이 괴로움으로부터 해탈시켜 주기를 기도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민한 내 앞에 나타나는 모든 사람들을 맑고 향기롭고 정직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나와 그 사람의 영혼이 하나로 만나는 행복을 내려 주기를 기도한다. 지금의 나는 바보라서 사람들에게 속거나, 혹은 의심이 많아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거나, 이 두 가지밖에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불안하고 불투명하고 불유쾌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만일 이것이 평생 계속된다면 인간이란 얼마나 불행한 존재일까.
- 夏目漱石, 유리문 안에서 中

유리문 안에서 I

8. 불유쾌함으로 가득 찬 인생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나는 자신이 언젠가 반드시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죽음이라는 경지에 대해서 항상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이라는 것을 삶보다는 더 편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어느 때는 그것을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지고至高한 상태라고 여길 때조차 있다.
"죽음은 삶보다 고귀하다."
이러한 말이 요즘 끊임없이 내 마음속을 오가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보다시피 이렇게 살아 있다. 내 부모, 내 조부모, 내 증조부모, 그리고 차례차례 거슬러 올라가면 백 년 이백 년 내지 천 년 만 년 사이에 길들여진 습관을 내 한 대代에서 해탈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삶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남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조언이란 아무래도 이 삶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생각하는 좁은 영역 안에서만 나는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인류의 또 다른 한 사람과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미 삶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신을 인정하고 또 그 삶 속에서 호흡하고 있는 타인을 인정하는 이상, 서로의 근본 도리는 아무리 괴롭고 아무리 추하더라도 이 삶 위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할 테니까.
"만약 살아 있는 게 고통이라면 죽는 게 더 좋겠지요."
이런 말은 아무리 하찮게 세상을 보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게 쉬이 입 밖에 낼 수는 없으리라. 의사들은 잠자듯 저 세상으로 가려는 환자에게 일부러 주사를 놓아 환자의 고통을 일각이라도 연장할 궁리를 하고 있다. 이러한 고문에 가까운 행동이 인간의 덕의德義로서 용서되는 것만 보아도 우리가 얼마나 끈질기게 삶이라는 한마디에 집착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나는 결국 그 사람에게 죽음을 권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도저히 회복될 가망이 없을 만큼 깊디깊은 상처를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다. 동시에 그 상처는 여느 사람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뿌리내려 그 사람의 얼굴을 빛내 주고 있었다.
그녀는 그 아름다운 추억을 보석처럼 소중히, 그리고 영원히 자기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아름다운 추억은 그녀를 죽음 이상으로 괴롭히는 처절한 상처 바로 그것이었다. 상반된 이 둘은 마치 종이의 안팎처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모든 것을 치유해 주는 '세월'의 흐름을 좇아가라고 했다. 그녀는 만일 그렇게 한다면 이 소중한 기억을 점점 바래 갈 것이라고 탄식했다.
공평한 '세월'은 소중한 보물을 그녀에게서 빼앗는 대신, 그 상처 또한 차츰 치유해 줄 것이다. 격렬한 삶의 환희를 꿈처럼 희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한편 지금의 환희에 따르는 생생한 고통을 잊게 해 줄 수단 또한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깊은 연애에 뿌리박힌 열렬한 기억을 도려내서라도 그녀의 생채기에서 뚝뚝 방울져 흐르는 핏방울을 '세월'로 훔쳐 주려고 했다. 아무리 평범해도 사는 쪽이 죽는 쪽보다는 내가 본 그녀에게 적당했기 때문이다.
하여튼 평소 죽음이 삶보다도 고귀하다고 믿고 있던 나의 희망과 조언은, 결국 이 불유쾌로 가득 찬 삶이라는 것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게다가 나에게는 그것이 실제 실행에 있어서 스스로 자신을 범용한 자연주의자로 증거케 한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했다. 나는 지금도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물끄러미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고 있다.
- 夏目漱石, 유리문 안에서 中

Product Introspection: Nishijin-ori

About 7 or 8 years ago, I found an old catalog of fabric swatches in a secondhand bookstore in Kyoto. There were a bunch of small pieces of Nishijin-ori fabrics attached to the pages, which were most likely used as fabric samples for kimono sashes.
I've always had an interest in kimonos and obis(sash) that were woven with gold threads, and I've seen my fair share of them that were manufactured during the Edo period, or even older than that.
I think the fabrics that they use are very interesting, but I also feel that they are often a bit too extravagant or fancy-looking. I thought that maybe by using the traditional techniques that were used to make these fabrics, I could create something new that was more suited towards my own, and Visvim's sense of style.
In most cases, silk is used for the warp and weft threads of Nishijin-ori fabrics. We intentionally used natural indigo dyed hemp yarn for the weft thread to provide a somewhat tougher look. We also used various colored gold threads to create the triangle motifs, a pattern that is commonly used by ethnic groups throughout the world, in an attempt to give it a more three-dimensional look.
The finished woven fabric combined the usual elegance typical of Nishijin-ori fabrics and a new masculine feel that is distinctly Visvim.
Nishijin-ori

The original form of Nishijin-ori has an extensive history dating back to around the 5th or 6th century. It is believed that settlers from China migrated to the site of present-day Uzumaki in Kyoto Prefecture, and brought with them techniques in sericulture and silk weaving.
During the Heian period, artisans who inherited these silk fabric techniques were brought together under a governmental textiles office called Oribe no Tsukasa established by the Imperial Court, where luxury fabrics such as twill and brocade were produced. As it were, a government-managed textile industry was being operated.
During the Muromachi period, a weaving group called the Otoneriza was established, who in addition to responding to the demands of the Imperial Court, also met the requests of orders made by general aristocrats and members of the samurai warrior class. However, during the middle of the Muromachi period, the Onin War, a civil war between forces loyal to the eastern lords and western lords broke out throughout Japan, with the most intense fighting held in the city of Kyoto. The fighting continued on for 11 years, forcing many artisans to flee and take shelter in nearby cities, particularly Sakai in Osaka Prefecture.
As a result, the entire textile industry was nearly extinguished. However, after the war, the artisans made their way back to Kyoto and the textile industry was revived in Omiya Imadegawa, the exact location the Western army had occupied during the war, which in Japanese was called 'Nishijin', which was how the name Nishijin-ori was derived. The Nishijin-ori trade began to flourish once again, and artisans in the Omiya area brought back the Otoneriza. By the middle of the Muromachi period, they became widely recognized as the leaders of the textile industry in Kyoto.
During this same time period, a new weaving method called the takahata (raised loom) was imported from China, which made it possible to produce mon-ori (brocade) using sakizome yarn, a traditional cotton fabric that is dyed before the weaving process. This firmly established the district of Nishijin as a major textile-producing center of the country.
Both Nishijin-ori and the district of Nishijin were recognized by the Imperial Court, and in addition to receiving conservation; they continued to produce high quality fabrics by incorporating techniques that originated during the Ming Dynasty in China. This became the silk fabric passed down for generations as a symbolic craft of Japan.
Visvim

怒り II


怒り

怒り I

怒り 2016
이상일, 渡邊謙, 妻夫木聰, 森山未來, 松山ケンイチ, あやのごう, 宮崎あおい, 広瀬す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