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6.2015

민주주의의 주체로서 "깨어 있는 시민"을 상정하는 것의 문제

(중략) 한국 사회의 진보적 지식인 일각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주체로서 "깨어 있는 시민"을 상정하는 것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특정의 이해 방법, 즉 민주주의를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한 도덕 운동으로 이해했던 방식과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민주 시민은 민주주의를 올바로 이해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는 존재 내지 의식적으로 각성된 존재로 이해된다. 민주주의를 이렇게 인식할 때, 민주주의 세력이 아니라고 간주되는 사람들, 즉 집권 정당에 투표하거나,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지 않거나, 집권 정부를 규탄하지 않거나, 투표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깨어 있는 시민의 범주에 속하기 어렵다. 민주 대 반민주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이런 인식은 자의적이고 주관적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깨어 있는 시민이라는 말은, 앞서 로버트 달이 말했던 것과 시민들이 이슈에 대한 계몽적 이해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기준과는 전혀 다르다. 로버트 달은 올바른 판단을 위해 관련 이슈에 대해 충분한 정보와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향유해야 함을 말할 뿐, 시민의 이해 수준이나 인식 수준을 기준으로 민주주의와 비민주주의를 구분하지 않는다. 반면 '깨어 있는 시민론'은 민주주의를 도덕화하는 정형화된 이해 방식에 따라, 민주 시민이라면 현실을 독해할 능력을 보여 주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민주 대연합을 촉구하는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주주의의 후퇴, 민생 파탄, 평화 위기"라는 정세관을 공유한 기초 위에서 "민주주의 위기 극복"을 위해 "행동하는 양심"으로 나서야 한다는 절박한 주장에 반응할 때 그 시민은 깨어 있는 존재가 된다. 그것은 진보적 운동의 전통을 앞세운 엘리트주의적이고 도덕주의적인 민주주의관의 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먼저 민주주의를 도덕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정의했을 때 그 해석자는 보통 시민들에 대해 일정한 도덕적 우위를 갖는 위치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사람들이 그렇게 정의된 민주주의를 수용하지 않을 때 그들 시민은 "깨어 있는 시민"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민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도덕적 지도자의 가르침의 대상이 된다. 이제 한 시민이 민주주의자가 되고, "깨어 있는 시민"이 되는 것은, 누군가가 그에게 부여한 도덕적 규범을 행동으로 옮기고 시민된 책무를 수행할 때이다. 이런 내용의 민주주의관은 시민에게 과도한 도덕적 의무를 부과한다. 그런 논리에 따르자면, 보통 시민들은 투사가 되기 전까지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누군가가 민주주의는 이런 것이다, 이런 것이어야 한다라고 정의해 주고 가르쳐 주기 이전에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들 속에서 발견되고 진화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점을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미국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였다. 그의 간결한 표현을 빌리면 "인민을 위해 민주주의가 만들어졌지, 민주주의를 위해 인민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샤츠슈나이더 2008, 215).
그의 관점에 따르면, 현실 속에서 인민은 온전한 주권자가 아니라 다만 절반의 주권자일 뿐이다. 민주주의하에서 인민이 투표를 통해 자기 의사를 표출하고 자신의 이익과 가치를 구현할 수 있으려면 정당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정치적 리더십과 조직, 대중과 전문가의 협력 체제, 정치적 이슈의 올바른 정의, 투표자의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갈등 축의 설정 등 민주정치의 대부분은 정당의 기능과 관련된 사항들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잘 실천하는 것의 책임은, 도덕적 책무를 부과 받는 시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의사와 요구를 잘 대표해야 할 정당에 있다.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유념해야 할 문제는, 민주주의에서는 그 누구도 시민들을 도덕적으로 압박할 특권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 최장집,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 中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