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2015

차등의 원칙

불평등을 줄이고 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분배의 평등을 실현하려는 노력은 정의로운 것이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들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 분배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불평등한 구조에서 어느 정도 또는 어떤 불평등이 정의로울 수 있는가는 분배의 정의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존 롤즈는 '불평등한 구조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불평등한 구조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유리한 불평등은 정의로운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약자에 대한 가장 유리한 불평등의 기준으로 "최소 수혜자 성원에게 최대의 기대 이익이 주어지는, '최소 극대화 형평 기준'을 제시한다." '차등의 원칙'이라고 불리는 이 원칙은 '경쟁의 결과를 나눌 때 불평등 구조에서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대의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분배의 정의라는 것이다.' 물론 불평등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용인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이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앞에서 논의했던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평등이 충족되는 구조에서 만들어진 불평등이라면, 불평등으로 인해서 가장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 사람들에게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대의 분배를 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다.
롤즈가 제시한 정의로운 분배를 규정하는 '차등의 원칙'을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는 우리가 해내야 할 몫이다. 한국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빈곤층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기 위해서 최대의 혜택을 얼마나 주어야 하는가, 기업이 만들어낸 이익 중에서 얼마만큼을 노동자에게 분배할 것인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를 얼마로 할 것인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를 얼마로 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은 시장에 맡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선택해야 할 문제다.
분명한 것은 노동자 세 명 중 한 명이 최저생계비 이하의 임금을 받는 한국의 분배 구조는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는데 소수만이 풍요를 누리고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함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한국의 경제구조는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이를 바로잡는 요구를 하는 것은 부자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심이거나 게으른 자들의 불평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이며 정의로운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분배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는 죽은 사회다. 불평등으로 고통 받는 가난한 자가 이러한 정의롭지 못한 분배를 시장경제의 당연한 귀결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이미 가진 자의 부와 권력에 예속되고 복종하는 노예이다. 불평등한 경쟁과 불평등한 분배를 시장에 맡기고 방치해버리면서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목적 자체를 상실하는 것이다. 불평등한 분배를 바로잡을 수 있는 수많은 정책들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한국 사회에 없는 것은 정책과 수단이 아니라 그러한 정책을 실천하려는 정치와 의지이다. 더 정확하게는 정치권에 그러한 정책을 실시하라는 국민의 절실한 요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미래가 암울하다.
'정의는 소수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빼앗아서 다른 사람들이 보다 많이 얻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고, 다수가 보다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서 소수에게 희생을 가용하는 것도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아무리 효율적으로 성장하는 체제라 할지라도 그것이 정의로운 분배를 실현하지 못한다면 개혁되어야 하며, 국민이 개혁을 요구해야 한다.
- 장하성, 왜 분노해야 하는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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