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2015

차등과 정의

분배의 불평등이 경쟁의 필연적인 결과라면 반복적인 경쟁이 이뤄지는 시장경제에서는 경제가 성장할수록 불평등이 더욱 심해진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이론적 시조라 할 수 있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도 '국부론'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큰 재산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큰 불평등이 존재한다." 더 많은 부가 만들어지면, 더 큰 불평등도 함께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불평등이 더 심해지는 것이 당연한 결과라면, 여기에서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성장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리고 경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불평등은 정의로운가? 이러한 질문들은 시장경제 체제의 정당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장의 목적이 무엇인가와 불평등이 정의로운 것인가의 질문은 서로 연관된 것이기에 이에 대한 답을 함께 논의해보자.
국가 경제를 성장시키려는 목적은 '국민'을 잘살게 하기 위해서다. 불평등이 성장의 불가피한 결과라면 국민이 평균적으로 잘살게 되었을지라도 모두가 성장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어떤 국민은 더 잘살게 되지만, 어떤 국민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모두가 똑같은 분배를 받는 산술적 평등이 최선일 수는 없다. 각자의 역량과 노력의 차이에 따라서 보상이 달라지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보상의 차이가 각자의 역량과 노력의 차이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학 교과서가 가르치는 것처럼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성이 담보되는 '완전한 경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시장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출발선도 서로 다르며, 경쟁의 규칙이 모두에게 공정하게 집행되지도 않는다. 학력·성별·출신지역 등의 차별로 경쟁에 참여하는 기회가 제한되며, 갑과 을의 관계나 독과점처럼 지배적 위치에 있는 경쟁자가 불공정한 경쟁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정치적 힘과 같은 경쟁 외적 요인을 동원해서 경쟁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들도 흔한 일이다. 이와 같은 기회의 불평등과 불공정한 경쟁으로 만들어진 불평등한 분배는 정의롭지 못하다. 그러나 정의롭지 못한 분배의 불평등은 불공정한 경쟁 구조만으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타고난 역량의 차이로 인해서 경쟁의 결과가 결정되기도 하고, 자신의 노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운에 따라서 경쟁의 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개인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개인의 역량과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강요된 사회-경제적 구조에 의해서 정의롭지 못한 불평등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성이 담보된 완전한 경쟁이 성립되고 그리고 분배가 각자의 역량과 노력만으로 결정된다고 해도, 경쟁의 결과로 소수만이 풍요를 누리고 국민 다수가 빈곤으로 고통을 받는다면 '다수가 고통 받는 경쟁을, 무엇을 위해서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당연히 제기될 것이다. 빈곤으로 고통 받는 다수가 자신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경제체제를 거부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이다. 애덤 스미스도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서 움직이는 시장이 다수의 빈곤과 고통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국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사람의 큰 부자가 있기 위해서는 적어도 500명의 가난한 사람이 있으며, 소수의 풍요로움은 다수의 빈곤을 전제로 한다."
국가 경제의 목적이 '다수의 빈곤을 전제로 한 소수의 풍요'일 수는 없다. 국가 경제가 성장해야 하는 이유는 '국민이' 잘살기 위해서이지 '소수의 국민만이' 잘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공정하고 불완전한 경쟁에 의해서 만들어진 불평등만이 정당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빈곤을 전제로 한 불평등은 과정의 정당성과 관계없이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진다. 다수의 국민이 더 잘살게 되고 소수만이 빈곤으로 고통 받는 그런 불평등은 정의로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불평등에 대한 논의의 범주를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넘어서 인간의 본원적인 가치인 자유와 정의 간 관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확대해야 한다. 이 질문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논제 선상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의 범주를 넘어선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정의에 관한 어떤 논의라 할지라도 약자와 소수자의 고통을 전제로 한 다수의 행복을 정의롭다고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빈곤은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며, 다른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는 어떤 개인의 자유도 정당화되지 못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현실은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소수의 풍요가 다수의 빈곤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차선으로 다수의 풍요가 소수의 빈곤을 전제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사회는 소수의 빈곤에 대한 책임이 있다.
- 장하성, 왜 분노해야 하는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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