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9.2015

정당한 심판

(중략) 청년세대가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 참여가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정치 참여의 방법 역시 달라져야 한다. 자신의 요구를 정치적 이슈로 만들어서 청년세대의 표를 원하는 정치인이 이를 공약으로 내걸게 만들어야 한다. 보다 적극적으로는 청년세대가 자신이 내건 이슈별로 정치 세력화를 시도해야 하고, 기존의 정치권에도 뛰어들어야 한다. 정치에 직접 나서는 자신 세대의 새로운 정치인을 청년세대가 지지해주고 키워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정치적 참여인 투표를 해야 한다. 청년세대의 일부는 기권을 정치 혐오를 표현하는 행동으로 여긴다. 그러나 기권은 자신이 혐오하는 정치를 더욱 더 혐오스럽게 만드는 것에 일조하는 것이다. 잉여와 3포가 희망을 찾는 길은 기권이 아니라 자신의 세대 이익을 내세우고 이를 받아들이는 정치인과 정당을 선택하는 것이다.
기회는 오고 있다. 2016년에 총선이 있고, 2017년에 대선이 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선거는 계속된다. 다음 총선에서 비정규직 폐지, 인턴 폐지, 임금 차별 폐지, 선행 학습 금지, 보육의 국가 책임, 알바 최저임금 인상 등 당장의 아픔을 덜어낼 수 있는 것을 청년세대가 정치적 이슈로 요구하고 청년세대의 표를 원하는 정당과 후보가 이를 약속하게 만들어야 한다. 청년세대의 요구가 정치적 압력으로 이어지면 소속 정당과 관계없이 많은 후보들이 받아들일 것이다. 또한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표를 얻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심판도 해야 한다. 그 대상은 너무도 분명하다. 지금의 국회의원을 심판하는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정치인이 공천을 받지 못하게 나서고, 공천을 받으면 낙선 운동도 해야 한다. 정치적 행동의 실천도 물리적으로 나서야만 했던 과거와 달리 인터넷상에 청년세대만의 많은 방법이 존재한다. 기성세대가 그들을 지지하더라도 청년세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심판하겠다고 나서면, 청년세대의 표가 필요한 정치인만이라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시민들이 스스로 해낸다는 말은 아름답지만 현실성도 없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도 법과 제도로 자리 잡지 않으면 지속되기 어렵다. 시민들의 힘만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혁명이다. 지금의 불평등한 한국을 '혁명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청년세대에게 미래는 없다. 그러나 '혁명'으로 바꿀 수는 없다. 정부가 육아를 책임져야 한다고 요구하고, 선행 학습을 하지 말자고 함께 행동하고, 알바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은 당장의 고통을 덜어내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마저도 청년세대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데, 혁명이란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그래서 현실은 정치다. 아무리 좋은 정책, 다양한 조직과 튼튼한 연대를 만들어도 현실에서 이를 시행하는 힘은 정치에 있다. 정확하게는 정치인에게 있다. 시민의 힘으로 시민이 원하는 것을 정치인이 하도록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다.
반값 등록금 투쟁이 절반의 성과라도 낸 이유는 정치인이 대학생의 표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유니온과 알바노조 같이 정말 오랜만에 나타난 청년세대의 "결사체들이 최종적으로 취할 핵심적인 방법은, 결집된 표의 힘을 통해 자신들의 정책 대안과 결집된 요구를 정치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정책 결정자 또는 정당에 대해 투표 블록(bloc)으로서 행위하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될 때 정당과 정책 결정자들은 반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강력한 힘이다."
정치인은 표를 먹고산다. 보수이든 진보이든 모든 정치인은 표밭에서 갓끈을 고쳐 맨다. 청년세대가 세상을 바꾸는 방법도 궁극적으로 표의 힘이다. "자본주의는 기득권 세력, 부유층 그리고 재벌의 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중산층과 서민 소외층 그리고 중소기업의 편이다. 자본주의는 '돈'이라는 무기가 있지만,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투표'라는 무기가 있다. 국민의 절대다수는 자본이 아닌 노동으로 삶을 영위한다. 그러기에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충돌할 때, 민주주의가 가진 '투표'의 무기가 작동되면 자본주의의 '돈'이라는 무기를 이길 수 있거나 적어도 제어할 수 있다."
그들이 약속한다고 해서 그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2017년 대선에서 다시 심판할 기회가 있다. 그리고 그 다음 2020년 총선에서 또 다시 심판해야 한다. 한 번의 투표와 한 번의 참여로 정치인과 정당이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청년세대의 반복적인 '심판 투표'가 계속되면 정당과 정치인은 바뀔 수밖에 없다. 그들은 표를 먹고살기 때문이다. 2016년 총선은 청년세대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세상을 바꾸는 출발이다.
10년 전 20대는 88만 원 세대라고 불렀다. 30대가 된 그들은 이제 3포 시대로 추락했고, 그 뒤를 있는 20대는 잉여 세대에서 n포 세대로 추락하고 있다. 젊은이들의 희망을 빼앗아간 지금의 한국은 기성세대가 만든 것이다. 청년세대여, 자신을 탓하지 마라.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틀에 순응하지 말고 거부해라. "청년세대의 반역이 부재하는 시대는 어둠의 시대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에 드리워진 어둠을 거두고 희망을 다시 세울 자는 젊은이들이다. 미래에 기성세대는 이 자리에 없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미래는 젊은이들의 것이다. 젊은이가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 장하성, 왜 분노해야 하는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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