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2019

얼어붙은 세상 II

6.
때로 세상은 '비현실적이며' (나는 그것을 달리 말한다), 때로는 '현실 유리적이다' (나는 그것을 아주 힘들게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현실감의 물러감이 아니다(누군가가 말하기를). 비현실의 경우, 현실에 대한 나의 거부는 어떤 환상(fantaisie)을 통해 표출된다. 즉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상상계라는 한 기능에 비례하여 그 가치를 바꾼다. 그렇게 해서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과 분리되며, 그의 사랑에 대한 유토피아나 우여곡절을 다른 측면에서 환상함으로써 세상을 비현실화하는 것이다. '현실'이 그를 방해하면 할수록 그는 이미지에 몰두한다. 그러나 현실 유리의 경우 현실감을 상실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어떤 상상적인 대체물도 이 상실을 보상하러 오지 않는다. 콜뤼슈의 포스터 앞에서 나는 '꿈꾸지' 않는다(그 사람에 대해서조차도). 나는 더 이상 상상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굳어지고 응고되어 불변의 것, 다시 말해 비대체적인 것(insubstituable)이 된다. 상상계(일시적으로)가 배제된 것이다. 전자의 경우 나는 신경증 환자이며 비현실적이거나, 후자의 경우 나는 미치광이이며 현실 유리적이다.

(중략)

8.
때로 섬광 같은 순간에 나는 잠에서 깨어나 내 추락을 뒤엎는다. 내 조그만 일상 생활과 거리가 먼 외국의 한 낯선 호텔방에서 불안에 떨며 기다리노라면, 갑작스레 하나의 힘찬 문장이 내 마음속에 떠오른다. "도대체 내가 여기서 무얼 하는 걸까?" 그때 현실 유리적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물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걸까? 사랑의 공간에, 아니면 세속적인 공간에? '실체의 유치한 이면'은 어디에 있는 걸까? 유치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말하여지는 "권태·고통·슬픔·우수·죽음·그림자·어둠을 노래하는 일일까?" 아니면 반대로 타인들이 하는 말하고, 지껄이고, 수다 떨고, 세상의 폭력과 갈등, 이해 관계, 그 일반적인 것을 이 잡듯이 하는 일일까?)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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