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2019

얼어붙은 세상 I

현실 유리 Derealite. 사랑하는 사람이 현실과 마주하여 느끼는 부재의 감정이나 현실감의 상실.

1.
I. "나는 전화를 기다린다. 이 기다림은 여느 때보다도 더 나를 불안하게 한다. 뭔가를 해보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방 안을 왔다갔다해 본다. 그 친숙함이 보통 때는 나를 위로해 주는 갖가지 물건들, 회색 지붕, 도시의 소음, 이 모든 것이 무기력해 보이고, 분리되고, 황량한 별자리처럼, 마치 인간이 한번도 산 적이 없는 자연처럼 얼어붙어 보인다."

II. "좋아하는 화가의 화첩을 뒤적거린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몰두할 수 없다. 그림의 가치는 인정하지만, 그 이미지들은 차디차 나를 권태롭게 한다."

III. "혼잡한 식당에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나는 괴로워한다(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지만). 괴로움은 군중·소음·장식품(조잡한 예술품 Kitsch)에서 온다. 비현실의 덮개가 샹들리에로부터, 유리 천장으로부터 떨어진다."

IV. "일요일 점심 시간 무렵 혼자 찻집에 앉아 있다. 유리창 너머 벽에 붙은 포스터에는 콜뤼슈가 얼굴을 찌푸리며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나는 추위를 느낀다."

(사르트르의 '구토'에서처럼 세상은 나 없이도 가득 차 있다. 그것은 거울 뒤에서 사는 유희를 한다. 아니 세상은 수족관 안에 있다. 나는 그것을 아주 가까이서 들여다보지만, 그것은 다른 물질로 만들어져 있어 나와는 분리된다. 나는 계속해서 내 밖으로, 마치 마약을 먹은 사람마냥 현기증도 흐릿함도 없이 '정확함'이란 것 안으로 추락한다. "오 내 앞에 펼쳐진 이 장엄한 자연이 마치 내게는 니스칠한 세공품처럼 얼어붙어 보인다네.")

(중략)

4.
나는 현실을 권력 체계로 받아들인다. 콜뤼슈, 식당, 화가, 축제일의 로마,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존재 체계를 내게 강요한다. 그들은 '무례하다'. 그런데 무례함이란 단지 '충만'이란 게 아닐까? 세상은 가득 차 있고, 충만이 그 시스템이다. 그리고 더 모욕적인 사실은 이 시스템이 내가 더불어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자연'처럼 제시된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사람(사랑에서 배제된)이 되기 위해서는 콜뤼슈를 우습다고, J식당이 괜찮다고, T의 그림이 아름답다고, 그리스도 성체절의 축제일이 활기에 넘친다고 해야만 하는 것이다. 권력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그 권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다시 말해 현실을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사랑하는 사람의 미덕을 위해서는) 얼마나 구역질나는 일인가? 그것은 마치 생트-마리-데-브와 수도원에서의 쥐스틴과도 같다.
내가 세상을 적의에 찬 시선으로 보는 한 나는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미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때로 이런 불쾌한 기분이 고갈되어 더 이상 어떤 언어도 갖지 못하게 되면, 그때 세상은 '비현실적(irreel)' 인 것이 아닌(나는 비현실에 대해 말할 수 있으며, 비현실에 대한 예술 작품 중에는 아주 훌륭한 것들이 많다), 현실 유리적인(dereel) 것이 된다. 세상은 현실에서 도주하여 어느곳에도 없다. 그렇게 하여 내게 유효한 의미란(그 패러다임은)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콜뤼슈, 식당, 화가, 피아차 델 포폴로 광장과의 관계를 정의하는 데 '이르지 못한다'. 권력의 노예·공범·증인이 아니라면 권력과 도대체 무슨 관계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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