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2020

불안의 책 II

171. (중략) 모든 것은 결국 주어진 상황에 의해 좌우된다. 거리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을 구경하러 주방에서 달려나온 요리사가 그로 인해 느끼는 즐거움은, 내가 매우 독창적인 주제에 대해 사색하거나 아주 수준 높은 책을 읽거나 아무 소용 없는 꿈에 잠긴 채 만족스러워하며 얻는 즐거움보다 더 크다. 삶이 기본적으로 단조로운 것이라면, 요리사는 나보다 훨씬 빈번하게 또 훨씬 수월하게 단조로움에서 벗어난다. 요리사와 나, 어느 쪽에 진실이 있는지 따질 수는 없다. 진실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다만 행복이 요리사 쪽에 있다는 건 확실하다.
자신의 삶을 아주 단조롭게 만든 이는 현명하다. 그에게는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가 경이롭다. 사자 사냥꾼은 세번째 사자를 잡은 이후에는 더이상 모험심을 느끼지 못한다. 반면 요리사는 거리에서 벌어지는 싸움박질 하나에도 세상의 종말 같은 자극을 느낀다. 리스본을 한 번도 떠나보지 못한 사람이 전차를 타고 벤피카까지 간다면 마치 무한대로 가는 여행처럼 느낄 테고, 어쩌다 신트라까지 가는 날에는 화성에라도 가는 기분일 것이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여행자는 길을 떠나 5천 마일 이상을 가면 새로운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는데, 항상 새로운 것만 마주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 계속되는 일상의 일부가 되고, 두번째로 발견한 새로운 이후에는 새로움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바다에 빠지고 만다.
진정 현명한 사람이라면, 읽을 줄 모르고 말상대가 없더라도, 자신의 감각과 결코 슬퍼할 줄 모르는 영혼만 갖고서 의자에 앉아 온 세상의 구경거리를 즐길 수 있다.
존재가 단조롭지 않도록 존재를 단조롭게 만들자. 지극히 무미건조한 것들로 일상을 채워 아주 사소한 일도 재미나게 하자. 언제나 똑같이 따분하고 의미 없는 일을 하는 회사의 근무시간 동안 나에게는 탈출의 환상이, 머나먼 섬에 대한 꿈의 자취가, 다른 시대의 공원에서 열리는 축제가, 다른 풍경이, 다른 감정이, 다른 내가 왔다 가곤 한다. 서류와 장부들 사이에서 나는 이 모든 걸 가졌더라면 어느 것도 내 것이 아니었으리라고 확신한다. (중략)
똑같은 하루하루가 반복되고 어제와 오늘이 머리털 한 올만큼도 다르지 않은 단조로움, 이거야말로 우연히 내 눈앞을 지나가며 나의 주의를 돌리는 파리 한 마리에도, 거리 한구석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도 즐거워하는 영혼을 선사해준다. 퇴근 시간의 자유로움과 휴일 하루의 무한한 휴식을 만끽하게 해준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므로, 모든 것이 되는 상상을 할 수 있다. 내가 만일 무언가 대단한 것이었다면, 그런 상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회계사무원은 로마 황제가 되는 꿈을 꿀 수 있지만, 영국 왕은 그럴 수 없다. 영국 왕은 꿈에서조차 자신이 아닌 다른 왕이 될 수 없다. 그의 현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中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