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략) 나는 나의 젊음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혼자서 눈물을 흘리며 크게 웃었다.
배제 대신 친화가, 반성 대신 자기 긍정이, 절망 대신 혁명이, 모든 것이 급회전했다. 나는 단순한 남자다.
낭만적 완성 혹은 낭만적 질서라는 개념은, 우리를 구원한다. 좋아하지 않는 것, 싫어하는 것을 꼼꼼히 정리하여 하나하나 배제하려고 노력하는 사이에 해가 저물어 버렸다. 그리스를 동경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분명히 이 세상에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단념해야 한다. 아, 고전적 완성, 고전적 질서, 나는 너에게 죽을 만큼 괴로운 연정을 담아 경배한다. 그리고 말한다. 안녕이라고.
옛날, 고사기 시대에는, 작가는 모두 작가이면서 동시에 작중인물이었다. 거기에는 어떤 꺼림칙함도 없었다. 일기는 그대로 소설이고, 평론이며, 시였다.
로망의 홍수 속에서 자란 우리는 그저 그대로 걸으면 되는 것이다. 하루의 노고는 그대로 하루의 수확이다.
염려하지 말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한다.
뼛속까지 소설적이다. 여기에 항복해서는 안 된다. 무성격? 좋아. 비굴? 괜찮아. 여성적? 그런가. 복수심? 좋아. 경박한 자? 또한 좋아. 나태? 좋아. 괴짜? 좋아. 괴물? 좋아. 고전적 질서에 대한 동경이든 결별이든, 모두 다 받아들이고 한데 묶어 그대로 걷는다. 거기에 성장이 있다. 거기에 발전의 길이 있다. 일컬어 낭만적 완성, 낭만적 질서, 이는 완전히 새롭다. 사슬에 묶였다면 사슬 채 걷는다. 십자가에 매달렸다면 십자가 채 걷는다. 감옥에 넣어졌다면 감옥을 부수지 않고, 감옥 채 걷는다. 웃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밖에 살 방도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웃고 있지만, 언젠가 자네도 짚이는 바가 있을 것이다. 남은 건 패배의 노예냐 사멸이냐, 둘 중 한쪽이다.
할 말을 빠뜨렸다. 이것은 관념이다. 마음가짐이다. 일상생활은 충분히 총명하고 주의 깊게 해야 한다.
자네가 얘기를 잘 들어주어서 무심코 중요한 사실을 누설하고 말았다. 이래서는 안 되지. 조금 불쾌하다.
자네에게 묻겠는데, 상징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애정의 섬세함을, 자네, 알겠는가.
아무래도 매우 불쾌하다. 조금이라도 자네가 이해하게 하려고 노력한 나 자신의 초조함을 깨닫고, 나는 이렇게 불쾌해졌다. 내 고독의 파탄이 불쾌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낭만적 완성도 말은 내가 꺼냈지만 퍽 의심스럽다. 이때 소리 있어 그 의심스러움까지 싸잡아 낭만적 완성이라 한다.
나는 딜레탄트(dilettant)이다. 호기심이 강한 사람이다. 생활이 작품이다. 횡설수설한다. 내가 쓰는 것이 어떤 형식이든, 그것은 틀림없이 내 전 존재에 정직한 것이리라. 이 안심은 엄청나다. 완전히 태도가 뻔뻔해진 것이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 어떻게 손댈 수도 없다.
- 太宰治, 하루의 노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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