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2014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그동안 펜을 놓고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우리는 아직도 위대한 착각 속에 살고 있다는 감이 든다. 아무래도 제정신들이 아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백주 노상에서 남의 허벅다리를 찌르지 않나, 무슨 책을 냈다고 지금도 잡아가질 않나, 누군가의 사상에 관해서 이야기한다고 어린 학생들의 주리를 틀지 않나! 그 모든 짓이 '좌'와 '우'라는 것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어찌 이리도 유치할까?
'좌'가 뭐고 '우'가 뭔고? '좌'는 절대로 나쁘고 '우'는 절대로 옳다는 전도된 사고방식은, 그러나 위험하고 유치한 이분법의 대표적 신봉자인 레이건이라는 사람조차 이제는 부정하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남의 나라 사람의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제시 잭슨이라는 미국 흑인의 말이 좋다. 대통령 입후보 경선에서 미국 사회의 제도적인 병폐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제시 잭슨에게 '우'라는 사람들이 '좌'라고 비난을 했다. 잭슨이 점잖게 반박한다.
"당신네들, 하늘을 나는 저 새를 보시오, 저 새가 오른쪽 날개로만 날고 있소? 왼쪽 날개가 있고, 그것이 오른쪽 날개만큼 크기 때문에 저렇게 멋있게 날 수 있는 것이오."
나는 뉴스를 보면서 "잭슨, 말 한번 잘한다"고 감탄했다. '우'라는 것을 무슨 신성한 것인 양 받들어 모시는 사람들이 아무 대꾸도 못 하고 나는 새만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그 새에는 두 개의 날개가 있었다.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다. 그리고 그 두 개의 날개는 멀어서 자로 잴 수는 없었지만 나의 눈에는 그 크기가 똑같아 보였다.
인간보다 못한 금수의 하나인 새들조차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를 아울러 가지고 시원스럽게 하늘을 날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우주와 생물의 생존 원리가 아닐까?
왼쪽 날개로만 날아다니는 새를 보고 싶다. 마찬가지로 오른쪽 날개 하나로 날아다니는 새를 보고 싶다. 그런 외날개 새를 한번 볼 수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만 같다.
인류가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쳐 창조한 지식과 축적한 경험은 정치나 이념적으로 말해도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하고 무쌍하다. 그리고 그 사이는 끝없이 풍부하다. '우'의 극단에 서면 우주의 모든 것이 '좌'로 보이게 마련이다. 조금 거리가 멀면 모든 것이 '극좌'로 보일 수밖에 없다. '좌'도 그 극에 서서 보면 모든 것이 '우'로 보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극'의 병리학이다.
벽에 걸려 있는 불알시계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착각에서 깨어날 때가 있다. 한번 오른쪽 끝까지 갔다간 왼쪽 끝까지 돌아가고, 다시 그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러면서, 아니 그래야만, 시계는 제구실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화가 나서 시계 불알을 오른쪽 끝에 못 박아보았더니 시계는 죽어버렸다. 이상한 일이다. 진자나 저울의 바늘도 중앙에 돌아와 서려면 좌와 우를 조금씩 왔다갔다하면서 편안하게 제자리를 잡는 것 같다. 그러고는 느긋이 안정을 누린다. 왜 그럴까?
8·15 이후 근 반 세기 동안 이 나라는 오른쪽은 신성하고 왼쪽은 악하다는 위대한 착각 속에 살아왔다. 이제는 생각이 조금은 진보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고야 어찌 새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는가?
- 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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